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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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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
{누군가의 자전거}
자전거의 맛

꼬로꼬로라이더  date. 2018.11.07

다친 아버지를 대신해 초밥 대회에 출전하게 된 쇼타. 효심은 눈물겹건만 경력과 실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돈과 권력, 예의 그 야비함까지 갖춘 라이벌은 좋은 재료들을 몽땅 빼돌리는 술책으로 쇼타를 곤경에 빠뜨린다. 그에게는 어렵게 구한 참치 한 마리가 전부이다. 묘책이 절실한 시점. 쇼타는 참치를 부위별로 각기 다르게 조리해 다채로운 맛을 연출한 “참치잔치” 한 접시로 위기를 타개해 나간다. 테라사와 다이스케의 만화 <미스터 초밥왕>에는 신기에 가까운 조리법으로 탄생한 궁극의 초밥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그럼에도 만화 속 초밥 중 꼭 한 가지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 선택은 역시 “참치잔치”다. 단일한 재료에서도 다양한 매력을 발굴해내려는 탐구 정신과 그에 걸맞은 섬세한 기술, 초밥의 정수가 “참치잔치” 안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자전거의 매력 또한 발굴하기 나름이다. 쇼타가 참치의 숨은 맛을 찾아내기 위해 여러 조리법들을 연구했다면, 자덕(자전거 덕후)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자전거의 맛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자전거를 경험하고 구동계를 탐구하며 이들의 조합을 실험한다. 스피드를 원하는 이는 사이클, 기동성을 중시하는 이는 폴딩 미니벨로에 빠져든다. 장거리 여행이 목적이라면 투어링 바이크(touring bike)에, 스릴을 즐기는 이라면 산악자전거(MTB)에 탐닉한다. 같은 자전거라도 목적에 따라 구동계부터 액세서리까지, 완전히 다르게 세팅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스피드를 즐기는 사람은 킥 스탠드(자전거 지지대)나 짐받이는 없애고 좀 더 가벼운 소재의 크랭크와 얇은 바퀴로 교체한다. 반면, 장거리 여행을 즐기는 사람은 짐받이와 페니어(짐을 실을 수 있도록 차체에 부착하는 전용 가방)를 장착하며, 웬만한 노면에서도 안심할 수 있는 튼튼한 바퀴를 선호한다. 경우의 수는 무한대다. 때문에 나는 자전거의 어떤 매력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지, 한 번씩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다양한 자전거를 용도에 맞게 최대한 자주, 어디든지 타고 다니는 생활밀착형 라이더다. 빨리, 오래 타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 흔한 싸이클 저지(일명 쫄쫄이,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입는 기능성 옷) 한 번 입어본 적 없다. 자전거 여행을 다닐 때에도 종주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놀며 쉬며 하루에 5-60km 정도를 가볍게 즐기는 타입이다. 때문에 내가 보유하고 있는 자전거들은 모두 도시 생활에 겨우 적응할 정도이거나 조금 편리한 정도의 성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는 속도나 적응력, 기동성 등 특정 성능에 꽂혀 자전거를 좋아하게 된 경우는 아니다. 나를 붙잡은 것은 팔 할이 자전거의 아름다움이다.


처음부터 뚜렷한 기준과 취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동안은 이 자전거를 보면 이것이 좋아 보이고, 저 자전거를 보면 또 저것이 예뻐 보였다. 입문자의 눈과 귀는 휴지조각보다 얇고 가벼웠다. 그보다 더 얇고 가벼운 지갑 사정이 아니었다면 온 천지가 자전거 무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자전거에 대한 나의 안목은 후지를 만나기 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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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FUJI S-3 1974



후지의 정식명칭은 FUJI S-3. 일본의 FUJI 사에서 1974년에 출시한 자전거다. 당시에는 스포츠용 경량 모델이었다는데, 내장 3단 기어에 무게가 대략 18kg에 육박했기에 빨리, 멀리 다닐 수 있는 자전거는 분명 아니었다. 당시 나는 이미 몇 대의 자전거를 보유하고 있는 터였고, 더 이상의 자전거는 필요치 않았다. 생활패턴과 동선에 따른 자전거 생활 시스템은 완비된 상태였기에 그 속에서 후지의 용도는 불분명했다. 게다가 가속화되어 가는 자전거의 증식 속도에 스스로 자중하고 있던 시점이기도 했다. 때문에 후지를 만나러 가는 순간에도 나는 그저 구경만 할 요량이었다. 정말 그랬다. 혹시나 엄청나게 마음에 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살짝 고민하기는 했지만.


후지의 첫인상은 그리 강렬하지 않았다. 뭐 좀 예쁘네, 연식에 비해 상태가 좋네, 끄덕였을 뿐, 고만고만한 다른 자전거들을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후지에 발목 잡힐 일은 없겠다 싶어 속으로 조금 안심하기도 했다. 문제의 감흥은 올라타고 나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후지는 승차감이 남달랐다. 사이즈나 세팅이 다른 자전거와 크게 다른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 몸에 맞춰 설계한 듯 편안했다. 잠시 발만 담갔을 뿐인데 어느새 발가락을 파고드는 물미역처럼, 후지의 안정감은 온몸에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날렵하고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단단하고 묵직했다. 화려하고 독특하지는 않았지만 꾸밈없고 기본에 충실했다. 내가 찾던 자전거의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었다. 구석구석 섬세한 만듦새와 안정적이고 정직한 비례. 아름다운 자전거는 믿음을 준다.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고, 비로소 함께 길을 달려도 안심이다. 나는 결국 지갑을 열었다.


쇼타는 참치잔치로 많은 주목을 받지만, 대회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참치잔치 안에 담긴 노심초사와 고군분투의 시간은 한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때부터 그는 초밥왕을 향한 쇼타의 긴 여정을 함께 하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자전거의 맛은 계절마다, 길마다, 사람마다 각양각색, 발굴하고 계발하기에 따라서도 천차만별이다. 계속해서 새로운 맛을 탐닉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만의 맛을 찾아 나갈 수도 있다. 후지를 만나고 나는, 내가 추구하는 자전거의 맛이 무엇인지 자각했다. 그는 나를 일깨웠고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오랜 시간 그는 동반자이자 길잡이가 되어 내 곁에 머물렀다. 하지만 궁극의 초밥을 향한 길이 멀고 험난하듯, 궁극의 자전거 또한 찾고 또 찾아야 하는 법. 탐미(耽味)의 길은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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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로꼬로라이더

커트 보니것을 흠모해 담배를 배웠지만 잇몸 염증에 굴복해 금연했다. 예술은 믿지 않는데 어쩌다보니 예술하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