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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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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준비호
{공동체와 예술}
LOG 1 : 여행의 제안

최창희 _ 감성정책연구소 소장  date. 2018.11.07

[공동체와 예술] 프롤로그



‘왜’ 공동체와 예술인가? 왜 예술의 이야기를 공동체와 함께 제시하려 할까?

현대사회에서 예술의 장면들 속에서 탐구되는 ‘공공’과 ‘공동체’의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2017년 5월, 또다시 공공미술이 큰 화제를 만들어내었다. 서울역 고가도로의 안전성 문제의 해결방안으로 자동차길을 사람들을 위한 보행도로로 변신시켰다. 그 ‘서울로7017’의 개장을 기념하여 설치된 황지혜 작가의 <슈즈트리>는 설치와 동시에 ‘흉물’ 논란에 휩싸였다. 호불호가 엇갈리며 ‘공공성’과 ‘예술성’ 사이의 오랜 줄다리기 같은 공공미술 논쟁이 다시금 제기되었다. 서울시는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는지 1억4천만 원 가량의 예산을 들인 작품을 ‘당초 예정된 9일간의 전시일정’에 따라 철거를 감행하였다. 심지어 청계광장에 설치된 클레스 올덴버그의 <샘>도 다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으며, 느닷없이 석촌호수에서 선보였던 플로렌타인 호프만의 <러버덕> 작품과 견주어 공공미술의 성공과 실패를 비교하며 대중의 이해를 얻지 못함을 비판하는 기사까지 보도되었다. <러버덕>은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은 성공한 공공미술이며, <슈즈트리>는 좋은 작품일 수는 있으나 공공미술로서는 실패하였다는 것인데, <슈즈트리> 작품만큼 혼란스러운 기사가 아닐 수 없다.


논란은 이번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논란이 잦은 ‘동네’ 이다. 공공의 예산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은 같은 공공예산으로 개최되는 비엔날레 등의 예술행사에 비해 평가가 혹독하고, 칼날이 서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대형사고가 터졌다. 대표적인 벽화마을로 손꼽히는 서울의 이화동의 한 벽화가 하루 밤새 ‘깨끗이’ 사라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몰려드는 관람객들 때문에 주민들이 ‘벌금’을 받을지도 모르고 분노를 표출하였기 때문이다. 벽화마을의 문제는 보다 복잡해진다. 이화동 벽화마을을 비롯해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 부산 감천문화마을 등이 벽화를 통해 ‘관광’지로 부상되자 지자체마다 벽화를 모셔오고자 혈안이 되었고, 이 때문에 전국은 벽화를 통한 동일화 현상이 야기되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관광지로 부상되자 발생하는 임대료 인상 등의 문제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까지 야기되었다.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이 공공예술, 커뮤니티 아트라고 불리우는 예술의 ‘장’에서 발생되고 논의되고 있다. 보다 대중과 가까이 ‘예술’을 나누고자 한 실천인데 욕은 더 먹는 것 같으니 좀 억울할 것도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술은 왜 사서 고생일까? 예술에 ‘공공’과 ‘공동체’를 덧붙여 예술은 훨씬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예술 행위에서 문제로 논의되는 것은 ‘예술성’과 ‘공공성’의 상충이다. 그렇다면 예술성과 공공성은 서로 상반된 것일까? 왜 예술은 애써 ‘공공성’을 들먹여서 가뜩이나 어렵다고 하는 것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 예술들의 행위들에 ‘왜’라는 질문을 달아본다. 그리고 그 고생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논의해보고, 그 행위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찾아보려고 한다. 아, 물론 불필요한 고생도 하나하나 뜯어도 보고 뒤집어도 볼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예술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계기가 마련되리라 본다. ‘함께’ 하고자 하는 예술이 왜 이러한 시도를 부질없이 하고 있는지와 그 ‘함께’의 의미를 우리의 삶과 함께 더듬어 볼 것이다. 그 함께라는 의미에서 ‘공동체’의 문제를, 그 공동체의 문제에 개입하려는 예술 행위들 속에서 예술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그려보려 한다.


최근에는 예술에 ‘공공’이라는 것 외에도 ‘생활’을 덧붙이기도 하고, 유휴공간에 예술을 덧입혀 ‘재생’을 시도하기도 하며, 과학과 경제 등등의 다양한 영역에도 예술을 가져다 붙여 ‘융합’적 사고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한 모든 곳에 ‘진정한’ 예술이 존재하고 있을까? 예술이 너무 많은 곳에서 펼쳐지고 있어서 예술이 어디에나 있는 것 같으나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무구한 인류의 역사에서 예술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 명명된 적이 있었을까? 여하간 예술이 어디에 있는지 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그 여행 속에서 보물을 발견하듯이 아름다운 예술의 형식과 삶의 방식들을 발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다소 긴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공동체와 예술이라는 문제를 머리에 이고 부질없이 걸어서 몸으로 문제들을 맞닥뜨리며 ‘함께’ 논의하며 해답을 찾아보자고 감히 제안해본다. 뻔뻔하게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보는 여행! 시간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 우리나라 공공미술 논의가 시작된 시점? 리차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 작품이 철거논의 되는 장소? 시간이 그것보다 훨씬 더 먼 과거와 미래로 이어질지 모르겠다. 또한, 대한민국 작은 땅덩어리에서 엄청나게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예술적 시도들에서부터 먼 이국땅까지도 함께 여행하려고 한다.


자, <공동체와 예술>의 여행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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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7017’에 설치된 높이 17m, 길이 100m의 작품 ‘슈즈 트리’(Shoes Tree)



프롤로그의 프롤로그


꽤 오래전부터 공동체와 예술의 주제로 글을 쓰고자 하였다. 관련된 주제의 연구와 함께 원고를 작성한 것이 있어 이것을 모으면서 하나로 완결된 책을 집필하고자 하는 것이 목표였다. 몇 번은 목차도 구성해보고 하였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자발적 글쓰기’에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함께’를 도모하였다. 그렇게 [우주마가린]과 함께 그동안의 여러 희망을 동시에 실현하게 되었으니 꿈같은 일이다.


어릴 때부터 예술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의미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였다. 그러한 질문의 연장으로 자연스럽게 공공미술과 커뮤니티아트 등은 주요 연구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인지, 그것의 연장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우연찮게 한국에서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될 무렵 그 현장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다. 2004년과 2005년에 걸쳐 짧은 기간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예술정책과에서 일을 하였었다. 그때 주요 업무는 미술은행 운영규정 마련과 해외사례 조사의 역할이었지만, 함께 공공미술 TF 구성과 첫 번째 회의를 준비하였다. 그 회의가 첫 단추가 되어 이후 2006년도에 <아트인시티 Art in City>(문화체육관광부 주최)가 시작되었고, 곧이어 2007년도에 서울시 주최의 <도시갤러리>가 팡파르를 울렸다. 이 두 사업은 모두 정부 및 공공 주도의 초기 공공미술사업이자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를 뜨겁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중 <아트인시티>는 문화체육관광부 사업으로 평가를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평가의 주관처였던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나는 시각예술 국고지원 사업의 평가 업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아트인시티> 평가를 진행하였다. 당시에 전국에서 펼쳐지는 공공미술 사업을 현장평가의 명목으로 필요 이상의 열정을 가지고 쫓아다니며 보기를 즐겨하였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공공미술에 관련된 정책연구에 참여하기도 했다. 건축물미술품설치제도가 개정되면서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공미술 사업 평가위원, 서울시의 공공미술 사업 자문과 심의 등을 통해 한국의 공공미술과 커뮤니티아트를 경험하였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이 경험과 과정 중의 숙고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함께 나누고 고민하면서 예술이 우리의 삶 속에서, 공동체 영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떠한 유의미한 가치를 형성하는지 함께 토론하는 공론장을 마련하고 싶다. 그 꿈의 시작을 이제야 펼친다. 공론장을 만들어 예술에 대해서, 우리의 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한판 신나게 춤추고 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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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감천문화마을 전경과 마을내 설치된 안내표지판


 프로필이미지

최창희 _ 감성정책연구소 소장

'문화예술공동체를 위한 감성정책연구소'를 운영. 그러나 박사논문 작성 핑계로 모든게 엉망진창이다. 빨간씨는 대학 시절 혁명을 꿈꾸며 사용했던 필명 주해(朱海)에서 파생된 닉네임.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함께’ 사는 것으로서 예술적 방법을 탐구하며, 돈보다 멋진 것을 추구하고 싶은 낭만적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