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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옛 그림과 동시대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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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즐거운 옛 그림과 동시대 미술}
전통 산수화에 나타난 은일 사상

박재은_자유기고가  date. 2019.07.24

전통사회에서 문인들은 일반적으로 관직에 나아가 입신양명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나라와 임금에 충성하는 것이 삶의 지향점이었다. 그러나 현실에 참여가 어렵거나 귀양을 사는 경우에는 산속에 은거하는 태도를 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동양에서는 은둔의 역사가 중국의 백이숙제(伯夷叔齊)부터 기록되고 있다. 주왕조 초기에 백이숙제 형제는 은왕조를 타도하려는 무왕에게 간언 하지만 이가 통하지 않자 세속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결국 아사(餓死)하게 된다. 이는 후대에 칭송받을 일로 전해지는데, 탈속의 정신성은 타협하지 않는 저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은일자는 높은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을 때 세속과 결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더불어 전통사회에서는 은일자에 대해 그의 성품과 기개를 동경하고 칭송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원대에는 과거제가 폐지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민족 억압과 차별정책이 실시되었다. 한족 지식인은 거지보다 아래였으며 기껏 창기보다 나은 계층으로 간주되면서, 유교문화에 젖은 전통 문인 사대부는 심리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기개를 유지하기 위해 이민족의 신하 됨을 거부하고, 산림에 은둔하여 '도사(道士)' 혹은 '처사(處士)'로 일생을 마치기도 하였다. 1 19세기 말 조선에 체류했던 미국인 선교사 그리피스는 조선에 은자의 나라라는 표현을 붙였다. 조선이 동아시아에 밀려든 근대화의 물결에 가장 마지막까지 저항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2 은자의 나라라는 표현은 미국의 입장에서 개항의 물결에 완고히 저항하는 조선의 은둔적이고 자폐적인 속성을 빗대어 나타낸 말이기도 하지만, 나와 다른 것으로부터의 저항은 주체를 지키기 위한 몸짓이며, 정신성으로 풀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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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애 - 그려지는 붉은 산수, 종이에 채색, 173.5×64, 2005


탈속, 은일 사상을 나타내는 것은 대부분 불교나 도교로부터 비롯된다. 속세를 떠나 도道에 이르는 승려들의 오래된 전통에서 알 수 있듯이, 탈속은 속세의 생활을 버린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모든 인간세상의 욕심과 애착과 욕망 등의 미묘한 감정과 세속 생활의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세적 삶의 부정은 사실상 삶에의 강한 애착을 의미한다. 3 탈속은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과 애착을 동시에 지녔다고 말해 볼 수 있는데, 삶에서 생기는 번민과 걱정과 욕망을 비우는 것은 집착을 버리는 측면이 될 것이며, 자신을 지키는 온건한 정신성으로 나아가는 방향은 삶에 대한 애착이 되며, 잘 살고자 하는 또 다른 건강한 욕망의 표현일 것이다. 탈속은 세속과의 결별과 마찬가지로 지나친 세속의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도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천지인의 일부인 인간은 인간적인 질서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는 속기에서 벗어나 탈속의 별유천지 비인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인간적인 세속의 질서와 물질적 향유와 향락에서 벗어나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천락天樂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 탈속과 은둔의 지향점이다. 하늘의 즐거움 지극한 즐거움, 온전한 즐거움 등은 모두 세속과의 거리를 두는 삶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지나친 세속과 물질의 향유로부터는 얻어질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문제를 완전히 외면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높은 학식과 고매한 인품을 바탕으로 그려진다는 문인화는 고상하고, 아취 넘치고, 탈속적인 그림이라고 회자된다. 그렇지만 돈이나 권력, 명예와 같은 '세속적인 문제'를 완전히 외면할 수 있는 문인화가들은 거의 없었다. 5 노장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마음은 예교( 禮敎)에 의하여 억압당하고 있다. 6 이것은 은일 사상이 유교적 세계관과 다르며, 공자가 출사(出仕)에 뜻을 두었던 것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은둔의 심리는 전진이 아닌 퇴행으로 볼 수 있다. 정신질환의 경계와는 차별되는 것이며, 정신분석보다 사회현상으로써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은둔의 목적에는 첫째, 정신적 여유나 자유를 위하여 안온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며, 둘째, 육체적 건강을 위해 자연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며, 셋째, 내면의 마음을 수양하기 위한 것이며, 마지막으로 정신질환 증세로 사회에 적응을 할 수 없어 은둔하게 되는 것이 있다.


은둔의 정서는 높은 자존심과 이상이 충족되지 않은 경우에 내부로 숨어드는 현상이라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크리스트교의 정신구조가 내면에 틀어박혀 불안과 공포로 반응하는 것을 가리켜 '은둔형 외톨이'라 칭한 바 있다. 이는 은둔의 정서가 타인과 소통을 단절하고, 내면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바이다. 종합해 보면 은둔자는 폐인과 성인의 양극단의 심리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높은 이상의 정신성은 성인의 심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나 두려움을 느껴 내부로 숨어드는 것은 자폐적인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산수화에서 은일자의 모습이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은 조선 중기이다. 여말선초의 제화시들을 통해 산수인물도가 고려 때부터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조선 중기에 가장 유행하였으며, 이후 조선 후기의 산수인물도들은 대개 조선 중기에 마련된 이미지를 차용한 것들이다. 8 산수화에서 등장하는 은일자는 성인의 경지에 있는 현인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빈번한데, 이는 높은 이상을 가진 현인은 세속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고매함을 가지기 때문이다. 세속의 향락에서 벗어난 경지, 즉 하늘의 기쁨을 알게 되는 선비는 산속에 들어가 도인이 되는 형태로 산수화에서 표현되어왔다.


조선 후기 청대의 문인들이 추구한 탈속과 선오(禪悟)의 경지는 지극한 정신적 경지였지만 검소하고 청빈한 생활상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경화사족의 문화를 탐미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선오와 탈속의 경지에는 분명 탐미적 유희가 감돌고 있었다. 9 탈속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향락을 멀리하는 특징을 지니지만, 은일자가 여유롭게 붕우(朋友)와 차를 마시거나 이수민의 <하일주연도>같이 풍성한 세속과의 어울림은 탈속이 완전한 세속과의 결별을 의미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게 한다. 조선시대 산수화에서 계절은 사계절 모두를 볼 수 있지만, 겨울산의 모습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겨울산을 묘사한 것 중 허련의 <설중고사도>가 잘 알려져 있다. 허련은 (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은일자에게 필연적으로 내포되는 것이 고독과 고립인데, 겨울산을 묘사한 <설중고사도>에서는 그것이 극대화되어있다. 어두운 하늘, 얼어붙은 강물, 하얗게 눈이 덮인 먼 산, 앙상한 나무들, 이런 모든 요소들은 서로 어울려 차가운 겨울 분위기를 한껏 자아낸다. 이러한 차가운 분위기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서옥(書屋) 속의 고사이다. 두건을 쓰고 홍포(紅袍)를 입고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선비의 모습은 이 그림의 핵심을 이룸과 동시에 생동감을 자아낸다. 백설 속의 일점홍(一點紅)이 유난히 빛난다. 10 이처럼 <설중고사도>는 겨울산의 고독을 잘 표현함으로써, 탈속성을 극대화하면서도 탈속성이 결코 생명력이나 활기가 없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탈속성은 생기 없는 고립의 특성만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탈속성은 무릉도원과 같이 이상향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에서 출발했음을 우리의 전통 산수화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은일자는 세속적인 쾌락의 즐거움에서 벗어나 한가롭고, 여유로운 일상의 즐거움에서 유토피아를 만나기 때문이다. 은일자는 요산요수(樂山樂水)하며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삶을 인생의 최고의 희열과 경지로 삼고 있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삶의 방식을 고수하려는 마음은 강한 주체성으로 표현된다. 현실과 타협하고 속세에 번민에 사로잡히기 쉬운 사람들에게 은일자의 강한 주체성은 본보기가 될만한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호불호(好不好)가 확실한 기개야 말로 주체성의 하나의 방식이며 은일자의 또 다른 얼굴이다.


오늘날 바쁜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한가롭고 단출한 일상의 즐거움이 더 절실히 요구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주로 그려졌던 산수화 속 은일자의 모습을 현대의 작가들 역시 차용하고 재해석해서 끊임없이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청록산수를 통해 은일자의 한가로운 여가의 모습을 즐겁게 묘사하고 있는 서은애 11 이발소 그림에 키치적인 액자를 끼워 넣어 삶의 이상향을 희구하는 산수를 그리는 오순환 12 등이 은일자를 통해 산수화의 현대적인 해석을 내놓고 있는 이들이다. 어쩌면, 조선시대 산수화에서 비롯된 은일 사상이 현대회화뿐 아니라 여러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가장 희구되는 이상향과 유토피아가 아마도 물 좋고 공기 좋은 산수화 속 풍경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 이 글은 필자가 2013년 강화역사박물관 특별기획전 <춘풍화기> 전시도록 논고로 발표한 바 있습니다.


1. 조정래, <원대 문인화의 발전과 尙意 傳統>, 미술사학보, Vol. 24 No-, 2005, p. 6. 

2. 심광현, <흥한민국>, 현실문화연구, 2005, p. 227. 

3. 박이문, <노장사상>, 문학과 지성사, 2004, p, 116. 

4. 강영희, <금빛 기쁨의 기억>, 일빛, 2004, p. 239. 

5. 박지현, <예스러운 새로움 그 즐거운 오해의 과정>, p. 13 <온고이지신> 전시도록 중 발췌 

6. 오비 고오이치, <중국의 은둔사상>, 강원대학교출판부, 2008, p. 133. 

 7. 한국정신치료학회 부회장으로 있는 심상호 정신과 전문의의 의견이다. 본 연구자와의 인터뷰에서 은둔의 목적에 대한 질문에 2009년 11월 20일에 이메일로 답변한 사항을 정리한 것이다. 
 8. 고연희, <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돌베개, 2007, p. 121. 
 9. 전개서, p. 282. 
10. 안휘준, <한국 회화의 이해>, 시공사, 2000, p. 324 
11. 서은애 - 한국화가, 1996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12. 오순환 - 2001년 남산화랑 전시 등이 있다. 본문에 언급된 작품은 남산화랑 전시에 출품되었던 <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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