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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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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항해일지}
항해일지 #3. 신인류열전(新人類列傳) - 나쁜 녀석들

성북동 아스팔트  date. 2019.02.27

#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비뚤어지고 싶은 내 맘을.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검은 에나멜 구두에 흰 원피스다. 커다랗고 챙이 큰, 신기하게도 늘 벗겨지지 않는 누런색 모자를 쓰고 자전거의 페달은 밟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치리링 차임을 울리며 섰다. 그녀에게서는 부잣집 냄새 – 미국 다우니의 향기가 흐른다. 그러니 잔치도 아니고 이벤트를 좋아했다. 등을 꼿꼿이 편 도자기 인형같이 자전거 안장에 앉아 쓸데없는 오락의 향기를 풍긴다. 그리고 인기 많고 쓸데없는 누군가의 자전거를 탐낸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 속의 맛을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애타게 찾는다는 것이 의외다. <밥상기억>으로 모두를 품을 그녀의 열정이 부럽다.

(오락부장 당선 축하)

 

그 할아바이는 모으는 데 애쓰고 쓰는 데 후했던 양반이었다. 늘 크게 쓰고는 모르고, 마을회비 안 낸 마을 사람들에는 도가 튼 타고난 일수꾼이라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자신의 장기를 살려 동네 총무를 자처하다가, 이름을 바꾸어버리고는 기행을 가겠다며 온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기행의 출발이 하루하루 연기되자 동네 사람들의 뇌리에서 그 할아바이의 기행 소식은 잊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뭣에 자극을 받았는지 예전부터 알았거나 오래 묵은 지인들을 소환한다고 공표했다. 그 할아바이는 돈과 사람 모으는 데는 세상 1등이었다. 그렇게 동네 총무를 나이 90까지 해 드셨다. 다행히 모은 돈을 어데 딴 데 쓰거나 본인 호주머니에 넣지 않아 동네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그리고 지금도 그 할아바이 무덤에 빨간 꽃이 놓이는 것을 보니 일수꾼이라는 별명은 당시 궁여지책이었을 것이다.
(총무 연임 축하)


뭐든지 안다며 줄줄이 꿰던 옆집 아저씨 순돌은 옥신각신하는 동네 사람들의 상기된 목소리를 지긋이 듣고 앉아 있다가 집 마당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뒷목을 쓰다듬기 일쑤였다. 뭔가 정리라도 해야겠다는 듯 “그거 말고...” “이건 어때...” “그건 이거지...” 류의 말도 쓰기 좋아했다. 깔끔하게 정리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지만, 평생 업보처럼 순돌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저 그 아재는 나서서 뭘 하기보다 조용히 사색하기를, 그리고 주변인으로 남기를 탐닉하는 전형적인 보헤미안이었을 뿐이다. 캬라멜을 좋아했으며, 고양이는 키우기를, 토끼는 그리기를 좋아했다. 뭐라도 앞장서게 하려 주변인들이 갖은 애를 썼지만, 본인이 동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순돌이었다. 누군가는 막말로 손이 가는 귀찮은 양반이라 폄하할 수 있겠지만 천성이 착한 순돌은 결국 얼리어답터로 세상에 한 획을 그었다.
(웹사이트 관리자 당선 축하)


나 오늘 어떤 동무를 다른 동무들 있는 곳에서 개자식이라고 불렀어. 정말 우리 어무이가 말하는 교양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추태였지. 개자식이라고 불렀을 때 오는 희열은 고작 세 시간 만에 사라지고 동무들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는 비폭력대화라는 뭐 같은 수업을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심각하게 생각했어. 이게 뭐야. 삼류 하류 인생 쌈마이처럼. 이러다가 선생한테 주어터지는 것은 물론, 단숨에 쫓겨날지도 몰라. 그전에 먼저 도망가자. 아냐. 적당히 해. 세상 남자들은 잘도 구수하게 넘어가자나. 모르겠네. 그대는 아는가 내 맘을. 음흉하게 깔아둔 내 맘을. 비뚤어질 테다. 이것들아.

(회의록 대충 연임 축하) 


동네 가면 바보 오빠 꼭 하나 있지.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다 괜히 기분 좋아지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꼭 그런 오빠가 여기도 있었어. 같은 방향으로 모여가는 것은 질색팔색인데다, 억지로 잡아끌었다가는 등짝 스매싱에 아간이 무너지지. 툭 하고 던지는 게 여간 찰지지 않고, 즉흥적으로 하는 일도 뭔가 깊은 맛이 있는 데다가, 과하지 않게 살아야 속이 편한 말 그대로 바람처럼 시원한 괴짜였던 거야. 바보는 무슨. 너 바보야? 명맥만 근근이 유지하는 생동감 없는 세상에 신물이 났던 게지.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는 무위에서 세상의 핵을 보는. 그 오빠야말로 진정 현자였다고 할 수 있어.

(홍보 대충 연임 축하) 


근데 동네 가면 정말 이장질하는 그런 애들 있잖아. 맨날 지가 회장 해 먹고 동네 힘쎈 놈들 끌어다가 뭔가 뚝딱해내는. 근데 진짜 뭔가 뚝딱해버리는 거야. 근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그놈 천성이었거나 야망이 짙어서가 아니라, 모지리 중에 모지리로 태어나서가 아니라, 그게 다 업보처럼 들러붙은 크립토나이트 때문이었대. 우주에서 나고 자란 진짜배기 영웅. 우주 용사였던 거지. 하지만 크립토나이트는 동전의 양면으로 블랙홀마냥 그의 신체를 조각내 버릴 수 있대. 공교롭게도 그날 우주의 힘에 견인되어 크립토나이트의 에네르기 장이 어그러지자, 그의 진가일지 비운일지가 저절로 드러나 버렸어. 그래서 힘들지 않다, 어렵지 않다, 하기 싫지 않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대. 사실은 그 별을 가장 향수했고, 가장 애정했던 마음이 자기장처럼 발현되었을 수도 있어. 그래서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비운의 운명을 받아들였을지도 몰라. 하지만 말이야. 지금은 말이야. 낭만을 찾아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그를 괴롭히고 있대. 밤마다 꾸는 악몽이 달갑지만은 않을 꺼야. 루이스를 찾아줘야 해.
(편집장 연임 축하)


 

그 동네 이름이 뭐냐고? 우주마가린이래. 혹자는 제2의 우주 시대의 서막이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구라를 쳤어. 기대할 이 하나 없겠지만 이래도 그만이지. 나이 먹는 게 어려워. 이대로 계속 늙어버릴 것만 같아. 에나멜 그녀도. 빨간 꽃 할아바이도. 얼리어답터 순돌도. 욕쟁이 언니도. 바보 현자도. 크립토나이트도. 이렇게 인생이 쇠하기는 억울했던 걸까. 각자가 각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동네 친구로 만나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해보려는 욕심이 과한 걸까.


귀에는 염증이 자라나고 코는 막히고 머리는 지끈거려 급히 먹은 약에 취해버려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께. 빵꾸똥꾸 애정이라고는 눈꼽 만치도 없이 휘갈겨 쓰는 글을 보고 누가 좋아하겠어. 그래도 뭐 어때. 우주마가린이래잖아. 그래 괜찮아. 우주마가린이래. 어서 와.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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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아스팔트

광활한 우주에서 미지의 세계를 만나듯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비싸고 만들기 까다로운 버터의 대체재가 되어준 마가린처럼 색다른 시선으로 공감되는 이야기들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