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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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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호
{항해일지}
중국식 벚꽃 회합 : 잃어버린 메모를 찾아서

성북동 아스팔트  date. 2019.04.30

4 23 일 화요일 오후 7 32 . 야근 막바지로 한참이던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 편집장이었다 . 의외의 시간이었지만 저녁이나 같이하자는 평범한 이야기겠거니 전화를 받았다 . 조금은 나른한 목소리였다 . "4 월호 원고에 항해일지를 실을 수 있을까 ?"

 

창간호 이후 편집장 측에서 먼저 원고를 요청해온 적이 없었던 터라 단순한 물음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리된 방담 원고 보았어요. 밥상기억도 완성된 듯하고, 예술이나 미술 쪽 글들은 꾸준히 올라오던데요. 바로는 어려워요."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 발행이지만, 아직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지 못한 데다가 4월 안에만 발행하면 4월호지 않겠냐는 것이 우주마가린스럽다고 생각해주시면 이번 일요일까지 될 수 있는 원고들을 모아보려 해요. 밥상기억은 아직 우주마가린 사이트 안에 메뉴화를 못 해서 발행이 불가능할 수 있어요. 하나로는 발행이 어려울 듯해서요."

 

방담을 하니 방전을 해서 개인적 글쓰기에 여력을 쏟을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본론에서 이탈할 듯하여 얼른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통화에 집중한다. "편집장님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상황이 위중한 거겠죠. 한번 해볼게요. 자신은 없지만."

 

우선은 시급을 다투는 회사 업무에 집중하기로 하고, 금요일 밤을 맞았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늘 꼼꼼히 메모하는 편으로 대개는 적어놓은 것들을 어떻게 풀어낼지 결정만 하면 술술 써졌다. 뭐라고 지적해대는 평론가도 없고, 맞다 틀리다 말해주는 선생도 없을뿐더러, 우주마가린 회원들은 애초부터 격려와 응원과 지지를 달고 태어났는지 뭐만 하면 다 잘했다 말하니, 얼마다 더 엉뚱해질까, 얼마다 더 기발해질까, 머리와 손만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 메모가 없다!

 

술술 써진다고 해도 '아침에 일어나 서랍을 여니 천사가 글을 배달해주고 갔다'는 아니다. 그저 워낙 회합이 재미지다 보니 꼼꼼히 적기만 해도 주옥같은 말들과 상황들이 넘쳐나서 조금만 정리하면 됐을 뿐이다. 그날도 분명 너무나 멋진 상황과 말들이 많았고, 고급야채볶음과 탕수육에 라조기, ()탕수육, 뚝배기짬뽕이 더해진 만큼이나, 중국식 탁자 위에 포개진 기가 막힌 말들이 그 메모장에 빠짐없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이미 편집장에게 약속한 바 있고 말을 뒤집기에는 이미 시간도 지날 만큼 지난 터라 일단 써야 했다. 먼저 기억에 의존해 한번 써 내려 가보기로 했다.


 

[ 미래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들] 중국식 벚꽃 회합

 

칭타오와 이과두주가 난무하던 길다란 탁자 위에 이야기꽃이 피었다. 미래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이라 분명히 말했는데도 그 걱정이 지금 이 앞에, 아니 삶에 실재하는 것 마냥 실감 나게 한 마디씩 포개기 시작했다.

 

탕수육 하나 더 시켜드릴까요.

 

합정동 오키는 반은 나무에 달려있고 반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꽃잎들이 과연 벚꽃 회합에 어울렸던 건지 그 길을 걸으면서도 내내 조바심이었다고 걱정을 토로했다. 중간정산이 교착에 빠졌다며 그녀는 외마디 ''을 외치며 두 손을 마주쳤다.

 

밥상기억을 보신 교토의 한 일본 할머니가 본인도 한편 찍고 싶다고 하셔서 곧 교토로 가게 될 것 같다는 꼬로꼬로라이더는 여전히 밉상이었다. 우주마가린 모임을 전해 들은 어떤 작가가 회합의 사회인류학적 기록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 한다는 말을 던지며 사마천을 똥강으로 처넣었다. 자전거 안장이 많이 남았으니 나누어주겠다고 큰소리를 치는가 하더니, 예술가로 계속 있어봤자 경력에 손실만 입을 것이라는 유머를 남겼다.

 

30만원어치쯤의 술이 냉장고에 있다는 빨간씨의 집에는 우리가 놀러 가주기로 했다. 집 뒤편 경치가 새벽 6시면 절경에 이른다며, 10시에 모여 아침까지 혹은 새벽에 모여 낮까지, 아니면 아예 낮에 만나잔다.

 

탕수육 한 번 더 하기로 해요.

 

지난번 러시아 룰렛식 이야기를 참치나무가 잘 정리해주었는데 .


 

망했다. 이건 저주의 시작이다. 이제 글을 끊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운명의 여신은 늘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니까. 토요일 아침부터 노트북 앞에서 씨름을 하니, 부스스 잠이 깬 심술만 여사가 방에서 나와 묻는다. "엄마 뭐해" "응 글 써" "잘 돼" "아니 잘 안 돼 슬럼프인가 봐" "슬럼프 이겨내기 어려운데 한번 이겨내면 늘어. 난 그림이 늘었어" "근데 지금 슬럼프에 빠지면 안 돼. 무조건 써야 하거든" "엄마 근데 슬럼프가 아니라 충동 같아 보여 충동은 쇼핑하면 풀려" "안 되겠다 아무래도 회사에 메모가 있는 것 같아 가보자" 심지어가 나타났다. "그래 그럼 거기 갔다가 옛날 생각 하며 임진각이나 놀러 갔다 오자"

 

또 망했다. 없다. 결국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편집장님, 아무래도 이번 원고는 어려울 것 같아요. 메모가 없어졌어요. 메모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요." 토요일 아침부터 우울하다는 편집장은 결국 "그럼 메모를 잃어버린 이야기를 써보세요."라고 말해주었다. 편집장의 그 한마디에 나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마음이 편해지니, 그 모임에서 방담 원고를 4월에 싣고 나면, 5월에 방담에 참여했던 자들이 모두 하나씩 글을 쓰겠다고 했던 것도 생각이 났다. 세대 간의 잘못된 만남, 한땐 젊었지만, 이제는 늙어가는 예술가의 초상, 당파적 삶을 위해 사회적 진로를 변경한 한 이방인의 이야기, 내 걱정을 넘어 만사를 모두 걱정하는 여인, 그리고 인정이 필요한 인간에 관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5월 중순에는 봄 피크닉을 가거나 여의치 않으면 그냥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각자의 코너들은 잠시 휴재하거나 방담 이후의 특별 기획으로 미뤄둘 것이다. 그러면서도 새 코너가 생기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나도 이참에 우주마가린 항해일지를 위한 노트를 새로 구입해야겠다.

 

그럼 그때까지 아듀.

 

슬럼프 망해라. 이 세상에서 사라져라. by 심술만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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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아스팔트

광활한 우주에서 미지의 세계를 만나듯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비싸고 만들기 까다로운 버터의 대체재가 되어준 마가린처럼 색다른 시선으로 공감되는 이야기들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