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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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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항해일지}
비워두고 버려두었던 시간들

성북동 아스팔트  date. 2019.09.05

활자 . 공백 . 활자 . 공백 . 그림 . 공백 . 활자 . 그리고 고성 .

 

슬럼프라는 이름의 공백이 내 생의 오랜 시간을 잡아먹었다. 아니 블랙홀 같은 무중력의 공백이 내 생을 지배해왔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누군가의 기대도, 누군가의 소망도, 누군가의 일탈도... 그저 명절 색동저고리, 천 원짜리 지폐처럼 그냥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기대에 충족하기도, 소망을 이뤄주기도, 일탈로 탈출하기도 버거웠던 시절이다. 그저 없었던 일인 듯 아침을 맞고, 할 일을 해내고, 다시 지쳐 잠이 드는, 말 그대로 반복되는 삶의 시간이 곱절이나 쌓였더랬다.

 

누군가가 말했다. 너의 인생의 소결은 무엇이냐. 감각적인 음악이 흐르고, 술잔이 오가는 와중에 뭐야 뜬금없이하면서도 실로 인생에 관한 질문이 오랜만인지라 끝내 생각이라는 놈에게 붙잡히고야 말았다. 질문이 소결이라. 반 백 살도 아직 아닌데, 벌써 인생의 결론을 내어야 하나 자못 멍멍해졌다. 하지만 소결보다는 국면이, 그 국면에서의 트라우마가 겹겹이 쌓여, 마치 오래될 나무처럼 나이테가 생겨나는 정도가 나의 소결이 아니었을까 대답해봤다. 여전히 대답은 멍멍했고, 이런 개소리가 어디 있나 잠시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국면이든 국수든 그간 살아내었던 인생으로 잠시 소환이 되는 추억이라는 낭만적인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내 인생의 국수는 어디에 있었을까.

 

다시금 정신을 차려 물고, 제대로 된 답을 해보자 생각하고는 소결의 의미가 뭔지 물어두며 시간을 벌었다. 하루를 끝내고 잠시 시간을 멈추어 버리듯 하루의 결절을 곱씹으며 이불킥하던 그 시간? 그때였는지 이때였는지, 그래서 이런 건지 이래서 저런 건지, 새벽녘 어스름 꿈같은 현실 사이를 요동치다 결국 몽롱하게 깨어나며 사지를 떨던 그때? 밀려들던 일들에 잠시 자리를 떠서는 화장실 한 칸을 오래 차지하며 머리를 감싸 물고 휴지를 뜯으며 휴지기를 가졌던 그 시간? 회의인지 회의적인지 무수한 말들과 말들이 물리학의 법칙 따위는 무시하고 탁자 위로 겹겹이 쌓여갈 때 저 세계로 넘어가며 의식이 하얘졌던 그 시간? 알코올 기운에 두뇌의 온도가 섭씨 38 가 넘으면 꽁꽁 묶어 두었던 지나간 시간들이 자동우산 절로 켜지듯 소환되었던 그때? 기억의 서랍 속에 고이 넣어두었던 생각의 편린들이 병풍이 되어 차라락 펼쳐지던 그때? 그렇다, 그것이다, 그것일까, 아마도 그것일 수도?

 

현재는 막막하고, 미래는 잡히지 않고, 과거는 트라우마가 되어 나를 괴롭히던 시간들이 나의 국면이자 소결이었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인지, 그때가 지금 도래하고 있는 것인지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이 난제다. 하지만 내가 적어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는 현실은 분명하다. 분명하다. 분명해야 한다.

 

2의 우주 이세계( 異世界 )는 아직도 저 멀리에 있을까.

 

정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혹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욕을 하며 발산하거나 내일을 도모하거나. 애저녁부터 발산할 수 있었던 자아라면 내일도 도모했겠다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일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화를 억누르거나 화를 없애거나 생각할 머리를 마비시키며 즉자적으로 응급처치 해왔던 것이 그간의 내 삶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만족스럽지 않으니, 계속 부유했겠지.

 

내일 일어나야 하는 시간까지 6시간 남았고, 내일은 커피를 3~4잔 마셔도 멀쩡해져야 하는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해일지는 남아야 하고, 그때 버려두고 왔던 시간을 기록해야 하고, 우리의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또 사적인 그 시간들의 기록은 필요하다고 마음을 먹어야 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게 기억하기 싫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생활과 조지 마이클의 키싱 어 풀이 흘러나오는 퇴근길의 라디오는 너무나 나른하고 퇴폐적이다. 우울증약을 먹는 그녀와 이제는 사랑할 수 없는 그녀와, 이제는 삶이 지겨워지는 여자가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살아내고 있다. 모두들 훌륭하다.

 

하루하루를 사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다.


(추신)

‘우주 마가린의 발행’, ‘한 달에 한번 모이기도 어려워졌다’라는 문제의식 아래, ‘호별 편집장 제도’, ‘우리글만 있으면 재미없다’는 의견들이 제출되었고, <기획이란 무엇인가>(가제)란 아이템을 공동의 프로젝트로 함으로써 전기를 꾀하자는 비책도 던져졌다. 하지만 추동력, 돌파구가 아직은 희미하다. 해서 아이템 혹은 스페어가 있는 <즐거운 옛 그림과 동시대 미술>, <밥상기억>을 다음 호 원고로 하기로 하고, ‘유달리 더웠던 이번 여름’ 쯤으로 모두를 위한 핑계, 슬럼프의 이유를 대강 만들어 두기로 하였다. 8월의 발행은 8.28.(수)에서 9.4.(수)사이에 하기로 하고, 원고가 되었다 싶으면 말을 하거나 글을 올리기로 했다. 9월 모임의 날은 9.25.(수)쯤으로 투표하기로 한다. 자, 대망의 9월 모임을 기대한다.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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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아스팔트

광활한 우주에서 미지의 세계를 만나듯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비싸고 만들기 까다로운 버터의 대체재가 되어준 마가린처럼 색다른 시선으로 공감되는 이야기들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