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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씨의 예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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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호
{빨간씨의 예술기행}
예술과 기업, 그 기이한 만남에 대한 조금 무거운 질문

빨간씨_자유기고가  date. 2019.09.30

빨간씨가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7년 10월 초 『컨템포러리 아트 저널』(Contemporary Art Journal) 특집 <기업과 예술의 신 밀월시대>의 청탁으로 작성했던 미출간(출간 예정) 원고입니다. 내부사정으로 출간이 지연되고 있으나 당 원고의 <우주마가린> 게재 허용을 득해 이를 알립니다. 

미출간 원고에 대해 <우주마가린>에 선공개를 허가해주신 관계자분들에게 심심한 감사 인사드립니다. 또한 이 글은 약 2년 전 작성된 원고임을 다시 알려드리며, 몇몇의 문장과 사례가 당시의 시기가 반영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박사논문작성으로 은둔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미흡한 활동에 죄송한 말씀 드리며, 2020년부터 활발한 활동 약속드리겠습니다.



예술과 기업, 그 기이한 만남에 대한 조금 무거운 질문

예술과 예술적 개입에 대하여


최창희



며칠 전 법률상 ‘근로’라는 용어를 ‘노동’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정치권에서 제기되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소위원회에서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안’의 우선 상정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한국은 여전히 노동이 아닌 ‘근로(勤勞)’가 요구되는 사회이다. 21세기를 맞이하고도 17년의 절반이 지난 한국의 모습이다. 


이러한 21세기의 한국과 비교되는 흥미로운 논문 1) 을 얼마 전에 발견하였다. 바로 18세기 독일 문학에서 나타난 노동의 두 가지 태도에 대한 것인데, 하나는 근면․성실로 대변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전형으로서 시민적 노동윤리를 계몽적이고 교육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서 캄페 J. H. Campe의 『어린 로빈슨 Robinson der Jüngere』(1779)을 대표적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영국의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2) (1719년)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노동은 새롭고 긍정적인 가치를 지님과 동시에 인간의 자기실현을 위한 능동적 행위이자 윤리적 덕목으로 제시하며 ‘근면’을 강조함과 동시에 게으름을 마치 질병과 같이 취급한다. 이러한 분위기에 낭만주의자들은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것이 다른 하나의 노동에 대한 태도인데, 이들 낭만주의자들은 분업화되어가는 산업사회의 요구들이 예술적 이상을 위협하고 있음을 통찰하였다. 자기소외와 분열의 징후를 예술의 영역으로 통일시키려 하였으며, “예술과 문학이라는 신성한 자율의 영역에서는 일상의 노동이 아닌 게으름(Müssiggang)”이라는 미적 원칙으로 대항하였다. 이러한 문학의 대표적인 것으로 논문에서는 슐레겔 F. Schlegel의 장편소설 『루친데』(1799)를 제시한다. 산업혁명 이후 ‘노동’의 의미와 가치가 변화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이러한 노동의 의미에 바로 낭만주의 예술은 ‘게으름’이라는 덕목으로 날 선 비판을 제기하는 대목에서 세 가지 가치 개념을 언급하고자 한다. 노동과 게으름, 그리고 예술.


한국에서의 예술과 기업의 만남 : 현황에서 정책까지


언제부터인지 꽤 오랫동안 예술은 다양한 만남을 시도해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부쩍 예술과 기업이라는 위계와 가치도 다른 두 만남이 종종 발견되고 있다. 바로 얼마 전인 9월 22일에는 <예술을 통한 혁신적 가치 창출>이라는 국제세미나가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기조발제와 패널토론으로 진행된 국제세미나는 예술가와 기업․기관 간의 새로운 협업을 탐색하는 ‘예술인파견지원’ 사업의 본질과 잠재적 가능성의 구현방안의 모색이 목적이었다. 또한 9월 7일에는 <문화예술, 기업과 동행하기>이라는 2017 기업협력사업 공모전 사업설명회 및 교육형 컨설팅 행사가 있었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주관으로 진행된 이 행사는 기업협력사업 개발을 원하는 문화예술단체를 대상으로 역시 기업과 예술의 만남의 주선을 넘어 그 만남의 성공을 위하여 하는 교육컨설팅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다. 앞의 국제세미나와 교육컨설팅 프로그램은 모두 ‘예술과 기업’ 관련된 정부 사업과 관련된 것이다. 하나는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파견지원 사업>에 대한 것이고, 후자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의 <기업협력사업 공모전> 사업에 관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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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인복지재단 주최의 국제세미나 <예술을 통한 혁신적 가치창출>(2017.9.22.) 패널토론 장면


이러한 예술과 기업과의 만남 또는 협력은 언제부터 논의되고 실행되어 왔을까? 기업에 대한 예술적 개입은 보다 초기에는 ‘융합’과 더 짝을 이뤄 제기되었었다. 타 분야와의 융합을 통해 시각문화의 확장과 새로운 예술담론 확장이라는 목적으로 2010년을 전후로 문예진흥기금사업이 공모되었다. 융합, 통섭 등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예술분야에도 제기된 이러한 시도는 정보과학기술 분야에서 선두적으로 언급되었으며, 특히 과학기술부에서는 2005년도에 첨단과학기술과 문화예술과의 융합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문화예술과의 융합에 대한 정책연구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이는 문화기술(CT) 개발과 문화컨텐츠 구축을 목적으로 제기되어, 원소스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 등을 통한 문화산업으로서의 디지털 컨텐츠 구축이나 산업과 경제와의 융합을 통한 고부가가치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3)


예술과 기업의 보다 초기 만남은 기업의 예술 후원일 것이다. 바로 메세나 Mecenat인데, 이는 기업들이 문화예술에 적극 지원함으로써 사회 공헌과 국가 경쟁력에 이바지하는 활동을 총칭한다. 이러한 메세나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의 대가들을 후원한 피렌체의 메디치가(家)를 바로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대표적인 메세나 활동으로 제기되는 것은 미국의 카네기 홀, 록펠러 재단 등이며, 국내에는 1994년에야 비로소 전경련을 비롯한 주요 경제단체의 발의로 한국메세나협회가 창립되었다.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을 통한 한국의 경제와 문화예술의 균형 있는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 설립 목적으로서 최근에는 기업과 예술의 만남 사업을 대표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이외 문화소외지역에 문화공헌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한국메세나협회에서는 일회적이고 일방적인 문화예술 후원활동에서 벗어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상호 발전을 추구하는 전략적 파트너십으로서 기업과 예술의 만남 사업을 대기업 결연과 예술지원 매칭펀드로 구분하여 시행하고 있다. 예술지원 매칭펀드는 중소∙중견기업이 예술을 지원하는 금액에 비례하여 예술단체에 추가로 펀드를 지원하는데 2016년에는 나노솔루션 기업과 서울발레단이, 서진캠과 아마도예술공간 등 약 120여 개 중소기업과 예술단체가 매칭되었다. 대기업과의 결연의 사례로는 GS칼텍스재단과 여수심포니오케스트라의 결연과 종근당과 아트스페이스 휴의 결연 등이 있다. 


이러한 메세나 활동 등이 보다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정책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것이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프랑스와 영국, 미국 등의 해외 국가와 시기적인 차이가 있으나 문화예술정책의 트렌드는 유사한 흐름을 보여준다. 해외 국가들은 40~6,70년대에 순수 예술 보호와 지원 중심의 예술 정책을, 6,70~90년대는 공공미술 등 대안예술의 육성을, 21세기에 들어서 예술산업으로 확장하는 경향을 가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1990년대 이후 압축적으로 전개된다. 특히 예술산업으로의 이행은 지난 말 많고 탈 많던 제18대 정부의 더욱 두드러진다. 국정비전과 국정기조로서 ‘문화융성’을 제시하며 문화예술을 통한 국가발전 및 문화를 국민행복 추구를 제시하며, 문화융성을 위한 마지막 세 번째 전략으로 “문화∙산업의 융합”으로서 상상력 기반의 콘텐츠∙관광∙스포츠 산업을 육성하여 세계가 찾는 한국 스타일을 만들며 국민의 삶을 보다 풍부하게 하는 것을 밝혔다. 또한 문화와 산업을 융합 전략으로 ‘한국 스타일’ 콘텐츠 산업 육성 등을 과제로 제시하였다.4) 그러나 예술산업에 대한 정책은 지난 정부에서 갑자기 제기된 것은 아니다. 제17대 이명박 정부는 새정부 문화정책개관으로 전통문화와 정신의 현대적 변용 및 창조적 활용과 문화산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육성한다는 추진방향과 함께 ‘품격있는 문화국가’를 비전으로 제시하였다. 5) 또한 마찬가지로 노무현 정부에서도 ‘창의 한국’이라는 비전과 함께 기본방향 중 하나로 “문화와 경제 신성장동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2004 문화정책백서』, 72쪽) 사족일지 모르나 지난 정부에서 예술시장과 예술산업이 과도하게, 또는 왜곡∙변질되어 추진되었다는 것은 탄핵심판과정에서도 다소 드러났다. 


예술적 개입으로서 예술협력의 의미


이러한 예술과 기업이 만나는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한 형태일까? 앞서 언급하였듯이 기업의 예술 후원이 가장 기초적인 형태일 것이다. 또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그 방식도 실로 여러 가지이고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다른 형태로는 예술산업으로 제기될 수 있는 ‘융합’이다. 문화컨텐츠 산업이나 예술과 산업의 콜라보레이션 등의 예술산업 역시 우리에게 그리 낯선 형식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다소 새로운 형식의 예술과 기업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 글의 초반부에 언급한 기업과 예술의 협력사업 또는 기업에 대한 예술적 개입으로 다소 간단하게 제기해본다. 이러한 형식으로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서 추진하고 있는 <예술인파견지원> 사업이다. 이 사업은 2014년도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여 첫해 참여 예술가의 수가 331명에서 매해 증가하여 2017년에는 1,000여 명에 이르는 규모가 되었다. 지난 4년간 사업에 참가한 기업과 기관 등은 모두 934개이다. 사업은 예술인 복지를 기반하여 예술의 사회적 가치 확장을 주된 목적으로 기업과 예술의 협업을 이루는데, 제품기획이나 홍보 마케팅 등의 콜라보레이션의 예술산업 형식과 기업의 사회공헌 유형, 그리고 직원교육 및 복리후생 등의 조직문화 개선의 형식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2016년에 삼일회계법인에 파견된 예술인들은 신입직원교육을 함께 기획하고 교육자료를 제작하였다. 삼일회계법인의 교육담당직원은 “기존에 시도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예술인들과 협업을 통해 재미있고 효율적인 교육을 진행하고 싶다는 요구에 따라 참여한 예술가들은 보다 유쾌한 교육자료를 예술적으로 제작하고 일방적 전달방식이 아닌 참여형 교육방식으로서 기업의 핵심가치를 그림으로 그리는 수업을 진행하며 동료의식과 애사심을 고취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주)세정에 파견된 예술가들은 기업 내 소통문화의 부재에 대한 조직문화개선으로 아트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타로를 통해 직원들 간의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 삼아 타로’ 프로젝트와 회사 내 빈공간에 작품을 설치하여 숨은 공간을 찾아내는 이색 전시와 함께 직원들의 회사 내 ‘자신만의 공간’에 대한 이벤트를 진행 등을 하면서 경직된 조직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올해 한화생명과 함께한 참여예술인은 예술 힐링 프로그램인 ‘해피 아트 콜’을 진행하였다. 주목되는 것은 무용가, 성우, 미술작가 등과 함께 콜센터 직원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드러나게 했다는 점이다. ‘당신의 앉은 자세는 어떤가요’ 주제로 발레 동작을 응용한 스트레칭과 ‘나도 목소리 주인공이다’라며 성우와 함께 발성과 호흡을 배우고, ‘얼굴 없는’ 콜센터 상담원들의 표정을 ‘마스크’를 뜨는 작업 등을 선보였다.  


이러한 예술과 기업의 협업 사업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여러 긍정적인 의미들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 둘의 어색한 만남에 간혹 당황스럽기도 하다. 어떠한 프로젝트는 예술협력 차원에서나 예술적 차원에서도 의미를 찾아낼 수 있지만 몇몇 프로젝트의 경우에서는 그 의미와 가치가 형식적인 것으로 머무는 것을 목도한다. 따라서 이러한 예술과 기업의 만남을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예술인 복지의 차원에서 예술가에게 일자리를 제공과 새로운 예술적 영역의 확장으로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라고 하기에도 아쉬운 점이 남는다. 또한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제품기획, 예술적 홍보 등을 통한 이윤창출 등은 사회적으로 유용할 수는 있으나 이 또한 의미 있게 평가하기에는 역시 한계가 남아있다. 그러나 그중에 조직문화개선 등이 예술적 개입에 가장 큰 효과로 제시될 수 있을 텐데, 그렇다면 예술적 개입을 통한 기업의 조직문화개선은 어떠한 이점이 있을까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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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인복지재단 주최의 국제세미나 <예술을 통한 혁신적 가치창출>(2017.9.22.)에서 「성공적인 창조적 파트너십의 형성」 주제로 지오바니 쉬우마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지난 9월 22일에 개최된 국제세미나의 예술적 개입의 대표적 연구자로 제기되는 지오바니 쉬우마의 「성공적인 창조적 파트너십의 형성」이라는 발표내용을 살펴보자. 그는 기업이 가치창조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는데 예술이 강력한 수단이라고 언급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 기업은 예술과의 협업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의 글을 인용하면, “‘예술’은 기업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롭게 한다. 예술은 사람들이 열정, 상상력, 열의를 갖고 참여하고 난세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기꺼이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조직환경을 만들고 격려하고 지원할 수 있다.” 6) 나아가 예술은 조직의 인프라 개발을 지원하는 가치 동인을 지원하고, 또한 기업의 명성과 이미지를 조성하는데 역할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는 아주 정확하게 예술이 그러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은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기반한 감각을 어떻게 참여’하는가에 있어서 미학적, 미감적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그의 글에서는 계속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 기업을 이롭게 하는 것이 예술에게 이로운 것인가? 기업을 이롭게 하는 것인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인가? 계속 자문자답을 해보았다. 대다수의 기업이 인간적인 조직으로 변화하면 그 기업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노동자의 삶이 보다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애써 답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목표가 그것에만 정향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이의가 발생되며, 또한 예술적 개입이 기업을 바꾸겠다는 것보다는 그것과 함께 이윤창출이라는 가치추구에 더 목적화되어있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윤창출 등의 가치는 문화체육관광부 등의 예술을 관장하고 육성하는 기관이 앞장서서 마련할 가치는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가 오히려 예술 본연의 가치를 왜곡하고 훼손한다. 


다시 예술과 노동, 게으름의 문제로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은 근대화, 산업화 시기 노동을 찬양하는 문화에 왜 반기를 들었을까? 그리고 근면성실의 노동이 아닌 게으름을 제기하였을까? “F.슐레겔의 『루친데』는 근대 시민사회 및 자본주의 경제의 새로운 덕목으로 떠오른 합리적 이성과 계몽적 사고, 진보와 노동 등을 거부하고 대신 한가로움과 도취, 감성, 상상력 등을 예찬한 대표적 낭만주의 작품이다.” 여기에 단편 「게으름에 관한 전원시」도 수록되어 있는데, 슐레겔은 ‘노동의 찬사’에 대립하여 ‘게으름’을 옹호하면서 게으름을 “신의 경지에 이른 나태의 기술”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이러한 한가로움과 게으름이 실현되는 곳이 바로 예술이다. 7) 근대화, 산업화, 분업화 등에서 야기되는 인간소외, 인간성 분열을 낭만주의자들은 ‘전인교육’의 의미에서 인간의 다른 활동-놀이, 교양과 예술 등-을 대치시킨다. 이러한 낭만주의 미적 교육에 대한 사유를 볼 수 있는 대표적 저서가 바로 프리드리히 실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이다. 실러는 미적 교육의 목적이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힘 전체를 가능한 최대로 조화롭게 형성하는 것”(20번째 편지)이며, 조화가 깨진 사람에게 조화를 재건하면서 인간을 “자기 자신 안에서 완성된 전체”(17번째 편지)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상국가로서 미적 국가는 오직 자유로운 놀이의 대상으로서만 대면하여 서며, “자유를 통해서 자유를 주는 것”이 이 왕국의 기본원칙이다. 8) 바로 인간의 시적 자율성, 유희가 수동적인 상태에서 능동적 주체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실러의 유명한 테제가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은 유희하는 경우에만 완전한 인간”이며, “인간은 아름다움과 함께 오직 유희해야 한다.”(15번째 편지) 그렇기 때문에 유희하는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예술이 우리 사회에 요구되는 핵심이다. 


예술적 개입을 통해 기업의 문화가 변화될 것인가? 아마도 그것이 가능하다면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도 마련이 될 것이다. 예술과 기업이 다양한 형태로 만나고 있다. 예술가들은 신종 아르바이트처럼 생각하며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과 같이 모이고 있다. 아르바이트처럼 생각하는 행위로서는 진정한 예술적 개입이 형성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기업 역시 단순히 예술가들을 활용해서 안이하게 무언가를 해보려 하는 수준에서는 그 어떤 화학적 변화는 형성되기 어려울 일이다. 무엇보다 기업에서거나, 정책입안자거나 행정가거나 예술을 도구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예술이 도구화되어서는 예술적 개입을 통한 기업의 변화, 사회의 변화는 결코 형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노동과 같으면서도 다른 것은 바로 도구화라는 점에서 해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같은 노동도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은 늘 모든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자율적이자 타율적인 것으로서의 동일성을 가지는 ‘유희’라는 힘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4_옥인 콜렉티브_서울 데카당스-Live_단채널 영상, 풀 HD, 컬러_005500_2015[꾸미기]list.JPG    5_콜트 콜텍 노동 자 밴드_꿈꾸지 마라, 다른 세상은 없다_오픈 퍼포먼스_2017(사진_김대환)[꾸미기].JPG

(좌)옥인 콜렉티브_서울 데카당스-Live_단채널 영상, 풀 HD, 컬러_005500_2015 작품에서 콜트 콜텍 노동자가 연기하고 있다. (우)전시 <꿈꾸지 마라, 다른 세상은 없다>(대안예술공간 이포, 2017.9.10~20. 이은화, 김태수 기획)의 콜트 콜텍 노동자 밴드의 오프닝 퍼포먼스_사진_김대환


계속 망설이면서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찬물을 끼얹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염두해 볼 일이다. 바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과 예술가들과의 만남이다. 경영상의 이유로 부당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은 10년이 넘도록 투쟁 중이다. 이 과정에 예술가들은 함께 공장을 지키면서 레지던시를 하기도 하고, 전시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며(콜트콜텍전, 2012),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얼마 전 한 전시에서 옥인콜렉티브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제작한 <서울데카당스-Live> 작품을 선보였다. 예술가들은 어떠한 대가도 없이 해고된 노동자들과 함께 예술을 하였다. 그리고 그 노동자들은 기업에서 부당정리해고 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례는 적지 않다.  


예술인복지재단이 주최한 국제세미나에서 제기된 질문 중 하나이다. 과정 중심의 예술협업 활동의 성과가 어떤 방식으로 미학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이다. 예술협업 또는 예술적 개입 모두 바로 예술이어야 한다. 새로운 예술적 행위가 기존의 체계와 달라서 예술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예술이 되지 못하는 것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 예술이고 예술이 삶이 되는 방식!



1) 논문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조규희, 「18세기 독일문학에 나타난 노동과 게으름」, 『세계문학비교연구 제51집』, 2015(2015년 여름호).

2)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작가 다니엘 디포(Daniel Defore)가 1719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원시적 자연 상태의 무인도에 정착하여 금욕적으로 생활하며 쉬지 않고 무언가를 생산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전형으로 근대의 낙관적 노동윤리와 경제적 개인주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3) 보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졸고 참고. 최창희, 「현대예술 속에서의 융합의 의미와 가치」, 『예술문화비평』제8호, 2013년.

4) 2013 문화예술정책백서, 2014, 3-8쪽

5) 문화체육관광부, 『2008 문화예술정책백서』, 2009, 25-30쪽.

6) 지오바니 쉬우마, 「성공적인 창조적 파트너십의 형성」, 20쪽

7) 조규희, 앞의 글, 426-427쪽.

8) 실러,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 윤선규 외 역, (『프리드리히 실러의 미적교육론』의 1부), 대화문화아카데미, 2015. 한진이, 「실러와 훔볼트의 미적교육」, 『프리드리히 실러의 미적교육론』, 380~386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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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씨_자유기고가

'문화예술공동체를 위한 감성정책연구소'를 운영. 그러나 박사논문 작성 핑계로 모든게 엉망진창이다. 빨간씨는 대학 시절 혁명을 꿈꾸며 사용했던 필명 주해(朱海)에서 파생된 닉네임.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함께’ 사는 것으로서 예술적 방법을 탐구하며, 돈보다 멋진 것을 추구하고 싶은 낭만적 인간이다.